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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계

《김씨표류기》 자발적 고립은 도망인가 희망인가

김씨표류기에 나오는 두 명의 김씨는 가까운 여러 관계에서 단절되고 표류한다. 고립된 이들이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희망을 찾고 발견하는지,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다시 맺는지를 웃기면서도 슬프게 보여준다.

 

남자 김씨는 빚에 떠밀려 한강에서 뛰어내리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살아남는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없고, 그를 발견한 유람선 승객은 조난당한 줄 모르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나간다. 수영을 못하는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의 한복판 밤섬에 홀로 갇혀 좌절한다.

 

허나 곤란하고 불편한 것도 잠시 뿐, 그는 곧 버섯을 따먹고 물고기와 잡아먹으며 무인도 생활을 만끽한다. 유람선이 근처를 지나갈 때는 누군가가 그를 발견할까봐 오히려 숨는다. 그렇게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그는 자급자족하며 무위자연에서 안빈낙도에 이른다. "심심하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심심함입니다." 그를 옭아매던 세상에서 벗어난 게 얼마나 홀가분할까.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세상의 압박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결국에는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지만,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되면 잠시라도 세상과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도움이 된다. 내 세계가 붕괴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순간에도 세상은 어떻게든 돌아갈 것이고, 그런 세상에서 다시 함께 살아가려면 살아갈 힘을 비축해야 할 것이다.

 

제목으로 쓴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헝가리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 하지만 도움이 된다.' 소극적인 선택이라도 괜찮지 않은가? 부끄럽게 도망쳤다고 해도 살아남는 쪽이 중요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이론도 반론도 인정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도망치더라도 이겨내요.

영화 '꿈의 제인'에서 제인이 한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우리 죽지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남자 김씨와 비슷한 여자 김씨도 있다. 한강 근처 아파트 고층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생활하는 그녀는 '뭐 필요한 거 없냐'는 엄마의 말에 '우유'라는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한낮에도 커튼을 치고 어둡게 사는 여자 김씨의 유일한 취미는 달 사진 찍기다.

 

달을 찍는 이유는 달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다면서. 이 장면에서 문득 어느 명절에 본 할머니의 표정이 생각난다. 명절 동안 가족, 친적과 시간을 보내다 모두 떠나는 명절 마지막 날에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다. 아마도 명절 전에는 그런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게 어떤 건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알고 나니 몰랐던 외로움이 생긴 것이다. 여자 김씨도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닐까.

 

가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더 외롭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낄 때가 그렇다. 어쩌면 여자 김씨가 은둔형 외톨이가 된 데에는 그런 일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사소하지만 값진 희망

그런 여자 김씨는 자신 만의 공간인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그중에 하나가 식사 후에 꼭 제자리걸음을 해서 만보기를 채우는 것이다. 만보기를 채우는 이유는 뭔가 한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라고 한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매일 반복해서 성취감을 쌓아가는 것은 살아갈 힘을 만들어준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사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가는 걸 보면 다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그런 여자 김씨가 커튼을 걷고 낮에 세상을 카메라로 보는 날이 1년에 2번 있다. 민방위 훈련을 하는 날이다.

1년에 딱 20분. 이 순간만큼은 세상은 아무도 없는 달과 같습니다. 기분이 달의 중력처럼 6분의 1로 가벼워집니다. 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습니다. 6분의 1만큼 가볍게 살 수 있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아무도 없는 세상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졌을까. 이제는 그녀가 달을 찍는 이유가 더 잘 와닿는다.

 

김씨표류기 포스터
castaway on the moon

 

20분 동안 세상 곳곳을 카메라에 담던 여자 김씨는 우연히 밤섬에 남자 김씨가 흙바닥 위에 써놓은 'HELP'라는 글자에 이어 그를 발견한다. 그 이후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점점 호기심이 생기고, 대화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외로운 외계 생명체와 일촌을 맺을 수 있을까요."

 

밤섬에서 홀로 생활하는 그가 외로워보여서 그런 걸까, 똑같이 고립되어 있는 자신과 비슷해 보여서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여자 김씨는 병에 쪽지를 담아 밤섬에 던져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걸 본 남자 김씨는 흙바닥에 글씨를 써서 답장을 한다. 싸이월드에서 남의 행세를 하던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와 만큼은 짧지만 진솔하게 대화하기 시작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잘 말하지 못하는 것도 낯선 사람에게는 쉽게 꺼낼 때가 있다. 커리어나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들을 미용실에 가면 술술 늘어놓지만, 친구들과는 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자 김씨는 익명성에 가까운 거리감에 더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동질감에 이끌려 진솔하게 관계를 만들어 나간 것처럼 보인다.

 

어느 날, 짜장라면 봉지 안에 든 짜장 스프를 보고는 짜장면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가는 남자 김씨. 면을 만들기 위해 밀을 찾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여자 김씨는 고민하다가 남자 김씨에게 짜장면을 배달보낸다. 그런데 남자 김씨는 이를 거절하고 돌려보낸다. 

 

어리둥절해하는 여자 김씨에게 중국집 배달원이 전해준 이유는 이렇다. "짜장면은 자기에게 희망이래요." 이룰 희망이 있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걸까, 자신의 힘으로 희망을 이루겠다는 걸까. 무엇이든 짜장면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남자 김씨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고 이어가게 만드는 희망. 다들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남들에게는 사소한데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이뤄가는 과정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

여자 김씨는 돌려받은 짜장면을 맛본다.

희망 백년 만에 들어보는 단어입니다. 남자가 보낸 이 거대한 희망을 맛보기로 합니다. 희망의 맛이 분명합니다.

희망은 전염되기도 한다.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가는 과정은 누군가에게도 빛나 보이고, 그 자체로 희망을 준다. 이런 희망을 경험할 탓일까. 뭐 필요한 거 없냐는 엄마의 말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방문을 열고 옥수수 키우는 데 필요한 거 사달라고 한다. 누군가의 희망은 다른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이뤄주기도 한다. 남자 김씨가 짜장면이라는 희망을 위해 옥수수를 키운 게 여자 김씨의 희망을 키운 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