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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진심이 관계를 만드는 순간들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제목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야구 심판과 유명 연예인이 연애를 한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도입부의 나레이션이 그 생각을 들려준다.

이론상으로 잘못된 건 없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우리나라 농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을 꺾는다거나 붕어빵 장수가 미스코리아와 결혼을 한다거나. 어지간해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만약에 이렇게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교통 의경 범수(임창정)와 무면허 운전으로 걸린 연극영화과 학생 현주(고소영)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범수는 운동장에 S자 코스와 T자 코스를 그려가며 면허 시험을 앞둔 현주의 운전 연습을 도와주고, 현주는 이에 대한 답례로 자신이 나오는 연극에 초대한다. 이후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점점 친해진다.

 

여기서 범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밤에 편지를 쓰다가 맞춤법이 헷갈리는지 자는 후임을 깨워서 4년대 대학 나온 걸 확인한 후 '왠지'의 철자를 물어본다. 요즘처럼 쉽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환경에서는 전달 속도에 더 신경을 써서 그런지 맞춤법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신경 쓰더라도 쉽게 검색해서 바로 고쳐쓸 수 있는 시대다. 그런 지금에 와서 보니 맞춤법에 맞게 쓰려는 범수의 노력은 더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하는 행동은 그 마음이 잘 전달된다. 누군가는 가볍게 생각할수도 있는 걸 신경 쓰며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써 보내는 일. 진심을 담은 노력, 받는 사람도 그걸 느끼지 않을까?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포스터
관계를 만드는 건 라면이 아니다

 

이 둘은 현주가 유학을 가며 소식이 끊어진다. 시간이 흘러 야구 심판이 된 범수와 유명 탤런트가 된 현주는 TV에 나오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다시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범수는 현주에게 어떤 사람일까? 다음 장면이 그걸 잘 말해주는 것 같다.

 

자신을 좋아하는 라면 회사 사장 지민과 불쾌한 일을 겪은 현주는 범수를 찾아간다.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현주는 '주차하지 마시요.'라고 쓴 주차 금지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이거 틀린 거 아니냐고 범수에게 묻는다. 이에 범수는 틀린 게 맞다며 이유도 상세히 설명한다. 설명을 듣고 현주가 웃으며 하는 말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범수씨는 예전 그대로네요."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는 특징이 아닐까. 범수의 경우에는 맞춤법과 더불어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나 태도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그를 보다 보면 야구 심판이 된 것이 맞춤법처럼 규칙을 지키는 것에 엄격한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주변에 많은 것들이 변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그대로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것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면 더욱더 그럴 것이고.

 

이런 특징은 멀어질뻔한 관계를 되돌려놓기도 한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클라이맥스다.

 

촬영을 위해 파리로 떠나야하는 날, 현주는 지민의 직원 삼식으로부터 범수의 편지를 전달받는다. 현주를 잊겠다는 내용의 편지다. 갑자기 변한 태도에 의문이 생겨 찾아가는데, 범수가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는 오해를 하고 파리로 떠난다. 그 사이 현주와 지민의 열애설이 터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현주는 입장 표명을 위해 기자회견을 준비한다.

 

삼식은 기자회견 질문지를 빼돌려서 현주에게 보여준다. "맞춤법 공부 좀 해야겠어요. 한 줄에 하나씩 틀렸잖아요." 하는 현주의 말에 "아, 제가 원래 가방끈이 짧잖아요."라고 대답하는 삼식. 그런데 일정하게 틀리는 맞춤법이 어디서 본 듯하다. 그녀는 파리로 떠나기 전 받았던 범수의 편지를 꺼내본다. 그런데 맞춤법이 틀려있는 것이 아닌가. '현주씨를 잊겠읍니다.' 그렇다. 그것은 범수가 보낸 것이 아니었다. 현주와 범수가 멀어지도록 삼식이 가짜 편지를 쓴 것이다.

 

오랜 시간 일관되게 쌓아 올린 면모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오해를 받아도, 머지않아 그 사람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삼식의 "제가 원래 가방끈이 짧잖아요."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왠지'의 철자도 몰랐던 범수에게 기자가 맞춤법을 물어볼 정도로 바뀐 것이 대조적이다. 만약 범수가 현주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나는 원래 그러니까 괜찮아.' 이런 생각으로 썼다면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태도.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지로 관계의 기반을 다진다. 범수의 마음이 빛나는 순간이다. 진심이 노력으로, 노력이 진심으로 와닿는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어떤 이들은 동화 같다고 한다. 우리도 모르는 새 슬쩍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일은 그 후로 얼마든지 더 있을지 모른다. 얼마든지. -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엔딩 나레이션